[사이버타임즈(cybertimes)=김재욱 영상전문기자]

시흥 MTV단지에 자리한 초고압 도체·접속재 전문기업 원컨덕터. 이곳 지상현 대표의 명함에는 '대표' 자리에 '대표 사원'이라는 낯선 직함과 자필 서명이 함께 담겨 있다.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직원들과 함께 벌어 함께 먹고살겠다는 선언이다. 그 명함 한 장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면, 서른일곱의 그가 무일푼으로 첫발을 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 건 내가 알아서 할게, 대신 손만 벌리지 마"
2000년, 지 대표는 잘 다니던 무역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제조회사를 차렸다. 서른일곱,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원래는 아내와 호프집이라도 하려던 참이었다. 처갓집이 음식으로 돈을 벌던 집이라 레시피까지 다 준비돼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10년 넘게 쌓은 기술이 아깝지 않냐, 음식점은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이건 시기가 있다"며 등을 떠밀었다.
고민하는 남편을 지켜보던 아내는 뜻밖에 담담했다. "그냥 해봐." 생활비도 못 줄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아내는 "내 건 내가 알아서 할게, 대신 나한테 손만 벌리지 마"라고 답했다. 그는 오히려 조건을 걸었다. 매달 생활비 150만 원은 무조건 준다, 17평 아파트 담보는 잡지 않고 이자는 내가 낸다, 회사 일로 절대 아내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 "이 세 가지는 때려죽여도 지킨다"는 다짐이었다.

첫 달 매출 80만 원,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사업의 첫 달 매출은 80만 원. 나간 돈은 200만 원이었다. 현대와 거래를 트려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업체에 술을 사며 버텼다. 문제는 수주를 받아도 재료 살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차마 돈을 빌려달라 말하지 못했다.
그를 살린 것은 그동안 쌓아온 신용이었다.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거래처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너 왜 우리 재료 안 갖다 써?" 2~3개월 대금이 밀려도 좋으니 갖다 쓰라는 것이었다. "네가 떼먹고 도망갈 놈은 아니니까." 그 덕에 운영자금 없이도 일할 수 있었다. 받아서 밤새 만들어 납품하고 대금을 빨리 회수하는 방식으로, 신용이 신용을 불렀다.
"위기가 곧 기회였습니다"
지 대표는 IMF도, 금융위기도, 코로나19도 자신에게는 기회였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이후 대기업들이 숙련 엔지니어를 대거 내보내면서 현장에 공백이 생겼다. 이론은 있으나 경험이 없는 세대가 도면을 검토하고 현장을 지시하면서 사고와 실수가 늘었다. 그 틈새가 그의 자리였다.
당시 그의 명함에 적힌 직함은 대표가 아닌 '공장장'이었다. "편하잖아요, 대하기가." 사장님 소리 대신 공장장을 자처하며 그는 도면을 직접 검토해주고, 현장을 봐주고, 지그를 만들어줬다. 기술영업 출신이지만 기계를 직접 잡아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그는 "원리를 알아야 방법을 알고, 견적을 넣고 개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3일
그럼에도 무너질 뻔한 순간이 있었다. 2003년, 업체에서 주문받은 신주(황동) 소재를 가공하려 트럭에 실어두고 덮개를 씌워놓은 채 하루를 넘겼다. 이튿날 아침, 소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가공까지 더하면 3천만 원어치. 돈도 돈이지만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공사에 지장을 주는 상황이었다.
"미친놈처럼 고물상마다 돌아다녔는데 끝내 못 찾았어요." 아는 사람의 소행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사흘을 헤매다 낙담한 그는 "진짜 죽고 싶더라"고 당시를 돌아봤다. 결국 그를 다시 일으킨 것도 사람이었다. 사정을 안 아내가 모아둔 돈을 내주었고, 사연을 아는 거래처가 재료값을 깎아주며 손을 보탰다. 그렇게 그는 납품을 정상적으로 마쳤다. "그때 3일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어요." 지금도 옛 거래처에 가면 밥값을 받지 않고 술을 사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무일푼으로 출발해 신용 하나로 위기를 넘어온 26년. 그 시간이 그의 명함에 '대표 사원'이라는 네 글자로 남았다. 2009년 8월 시흥 MTV단지에 자리 잡은 원컨덕터는 지금 초고압 접속재를 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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