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타임즈(cybertimes)=김재욱 영상전문기자]
원컨덕터. 시흥 MTV단지에서 초고압 도체·접속재를 만드는 이 회사의 공장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붉은빛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죄다 동(銅)이다. "초고압 전기 도체를 하려면 알루미늄이 아니라 동으로 해야 한다"고 지상현 대표는 말한다. 제품 하나에 동이 60% 이상, 알루미늄이 40% 남짓. 그 무겁고 값비싼 금속이 기계에서 깎이고 다듬어져 나오는 현장을, 지 대표는 마치 자기 집 안방을 안내하듯 층층이 짚어 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초고압 전문가의 출발점이 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건축 분야에 오래 몸담았던 그가 낯선 세계로 방향을 튼 것은 서른일곱, 적지 않은 나이였다. 아내와 조용히 분식집이나 차릴까 하던 그를 붙잡은 것은, 그동안 쌓은 경력과 인적 자원이 아깝다는 지인의 권유였다. 그렇게 그는 기계와 선반 한 대로 공장 문을 열었고, 완전히 다른 업종을 스스로 공부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그가 보유한 초고압 특허가 30여 건이라는 사실은, 그 전향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 용도가 촘촘히 나뉘어 있다. 1층은 표면을 거칠게 하는 샌딩, 2층은 알곤 용접과 조립, 3층은 자재실과 조립실. 원래 직원 휴게실과 방 여덟 개짜리 기숙사, 체력단련실까지 갖췄다. 레이아웃은 전부 그가 직접 그렸다. 제품은 프로그램 작성에서 시작해 가공과 검사, 조립과 포장을 거쳐 출하까지 이어지고, 그 전 과정이 MES로 관리된다. "하반기부터는 종이 도면을 없앨 거예요. 기계마다 도면을 붙여서, 종이 안 보고 기계에서 바로 작업하게." 서류를 없애는 것, 그것이 그의 오랜 목표다. 책상 위에 쌓인 26년치 서류 뭉치를 가리키며 그는 "이걸 정리하는 게 제3자한테 넘겨줄 목표"라고 했다.
기계도 예사롭지 않다. '280LM', 'LMC' 같은 표식이 붙은 설비들은 시중의 일반 기계가 아니라 원컨덕터 제품만을 위한 전용기다. 옛날엔 선반과 밀링을 따로 하던 작업을, 이 전용기는 머신센터 기능까지 얹어 한 번에 처리한다. 공정이 줄어드는 만큼 이것이 회사의 경쟁력이다. "기계값에서 프로그램비가 거의 3분의 1을 차지해요." 원컨덕터가 상대하는 영역은 지상 송배전과 지중 접속함, 차단기, 배전반, 철도 차량까지 초고압 전기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첫 소재를 빌려준 사람들, 그리고 신뢰라는 밑천
지 대표가 26년을 버텨온 힘을 스스로 꼽자면 결국 하나로 모인다. 신뢰다. 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무렵,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수주는 받았는데 금형을 만들 재료비가 없어 손을 놓고 있을 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주변 거래처들이었다. "왜 내 거 안 쓰냐고 하더라고요. 돈이 없어서 떼먹을 수도 있다고 했더니, 너는 떼먹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소재를 빌려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는 이 신뢰가 쌓이는 방식을 잘 안다. "지금 당장 이익을 보면 2차, 3차가 힘들어요." 대신 믿음이 가고 진실하게 하다 보면 끝내는 알아봐 준다는 것이다. 다만 그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거짓이 하나 뻥 터지면, 그걸 밝히는 데는 세 배, 네 배, 열 배가 들어가요." 그는 요즘 디자이너들이 직접 창작한 작업물을 두고 AI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받아 피해 보는 상황을 예로 들며 안타까워했다. "쫄딱 망하고 나서 진실이 밝혀지면 뭐 하겠어요. 너무 늦을 때가 있다고."
소수 때문에 다수를 망치지 말자
직원들과의 관계를 두고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저요? 욕만 먹어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정은 조금 다르다. 명절이면 30명에서 50명에 이르던 직원들에게 그는 거래처 임원급에게나 보내던 20만~30만 원짜리 선물 세트를 똑같이 챙겨 보냈다. 귀향길 차비로 10만~30만 원을 얹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속을 썩이는 것은 늘 한두 사람이었다. 한우 세트를 두고 "질기다", "광우병" 운운하거나, "10만 원이 누구 코에 붙이냐"는 소리가 나오면 그는 상처를 받았다. "잘못 갖다 놓은 것도 아닌데." 그럴 때면 홧김에 한두 해 선물을 끊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시작하길 반복하며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소수 때문에 다수를 망치지 말자. 누가 욕하든 말든 내 할 일 내가 하자." 굳이 변명하려 들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1/n 곱하기 백분율, 함께 벌어 함께 나누는 법
올해 예순셋. 지 대표는 두 번째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그리고 있다. 지난해 그가 내건 다짐은 '다시 뛰는 원컨덕터'였다. 그 다짐의 핵심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시대는 지났어요.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게 중요하고, 같이 하는 게 중요하죠." 능력이 된다면 많이 벌어 많이 나누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주변에서 죽도록 일하고 써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지인들을 볼 때마다 그 마음은 더 단단해진다. "죽어서 뭘 남겨요. 가족과 이름을 남긴들, 그때는 늦었죠. 되도록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살고 싶어요. 천 원 더 가져가는 것보다 같이 나눠 먹고 싶고."
그렇다고 똑같이 나누자는 것은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늘 들어 있는 원칙은 '1/n 곱하기 백분율'이다. 기여한 만큼, 성과를 낸 만큼 가져간다는 뜻이다. "구두로 열심히 했습니다, 이건 의미가 없어요. 데이터에 결과를 가져오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회사를 MES와 업무 플로우 기반으로 바꾸는 중이다. 8월부터 12월까지 관리자 중심으로 데이터를 쌓고, 그 자료로 2027년 연봉 협상을 하겠다고 직원들에게 공언했다. 급여는 일반적인 수준으로 책정하되 성과금을 얹고, 자신이 투자한 운영비를 회수한 뒤 남는 이윤을 연말에 정산해 나누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세 가지 축이 복지와 기술력, 대응력이다. 사내복지기금을 이미 설립해 운영 중이고, 장학금이나 장기근속 포상도 염두에 두고 있다. 경쟁력은 값을 깎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고 그는 못 박는다. "남들보다 싸게가 아니라, 같은 제품 같은 가격에 빨리 대응하는 게 경쟁력이에요."
"E나래", 함께 날개를 펴는 판
원컨덕터가 살아야 그가 그리는 더 큰 그림도 선다. 그 그림의 이름은 'E나래'다. 전기 업종의 지식과 사람을 한데 모아 날개를 펴게 한다는 뜻으로, 이미 비영리단체로 등록을 마쳤다. 언론과 금융, 보험, AI, IoT, 전기, 경영 각 분야 전문가를 비상근으로 두고 MOU를 맺어, 협력업체들이 이곳에 오면 금융과 신용, 운영에 관한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방식은 그가 늘 강조하는 '아이디어의 조립'이다. 좋은 아이템을 가진 사람이 찾아오면 금형·가공·판넬·도장·AI·IoT 전문가로 그룹을 짜 제품을 완성한다. 현대나 효성 같은 대기업이 새 프로젝트에 수억 원을 들여 인력을 스카웃하는 대신, 이 판에 의뢰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만 평에서 3만 평 규모의 지식융합센터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운영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이디어와 아이템으로 지원하는 역할이다. 산업단지공단 관계자, 역대 시장들과도 협의해 "좋은 아이템이니 현실화하라"는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로드맵은 분명하다. 예순다섯까지 컨셉을 마무리하고, 일흔까지 실현하며, 일흔부터는 봉사와 아이템 지원으로 물러나 회사가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것. 스스로 매긴 진척도는 "30% 정도"다. E나래 설립도, 제2공장 부지 확보도 이미 끝냈다.
506번째 감사 일기, 그리고 아침의 되새김
이 모든 구상의 밑바탕에는 그의 아침이 있다. 지 대표의 하루는 세 가지 의식으로 시작된다. 일어나면 미지근한 물 한 컵과 영양제, 통창 커튼을 열고 신선한 공기와 태양을 마주하는 되새김, 그리고 출근길 30분. 그 30분 동안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연을 맺은 180명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는 축하를 건넨다. 어디서 주워 온 글이 아니라 직접 읽고 듣고 다듬은 말들이다.
감사 일기도 빼놓지 않는다. 휴대전화에 쓰기 시작한 일기가 이날로 506번째. 1년 반 가까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침에 느낀 것을 쓰고 저녁에 감사한 것을 쓴다. 메모장은 그의 또 다른 무기다. 업체별, 특허별, 차량 관리에 아이디어까지 카테고리로 나눠 관리하고, 명함 정리법으로는 특허까지 냈다. 아이패드와 맥북, 노트가 서로 연동돼 있다. 요즘은 이 모든 것을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플랫폼에 녹여 넣어 자신을 계속 보강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공장 벽 곳곳에는 문장들이 붙어 있다. '기본에 충실한 자가 결과를 지배한다', '믿음을 만드는 회사', 'One can do it'. 그중 상당수는 직원 이재원 씨의 머리에서 나왔다. 물 위에 뜬 배가 가만히 있으면 뒤로 밀리듯,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멈추지 않는 꿈'이라는 문구도 그렇다. 지 대표는 그 문장을 아직도 머릿속에 안고 다닌다고 했다.
올해 그가 정한 화두는 직원들의 의식 변화다. 감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 그는 이미 직원들은 물론, 자신이 회장을 맡은 산업기술대 대학원 동문들까지 직접 AI 활용법을 가르쳐 왔다. 스스로도 AI 세 종류를 쓰며 '나에게 맞는 비서'를 만드는 중이다. "제가 백을 다 끌고 갈 수는 없어요. 다만 삼십이든 사십이든 시작되면 차이가 느껴질 거고, 그러면 스스로 안 할 수 없게 되겠죠." 그는 언론에 자신의 계획을 내보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공표해 놓으면 아무래도 더 실행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나 스스로와의 약속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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